![[소마미술관] 기념에서 풍경으로 전시 포스터](/_next/image?url=https%3A%2F%2Fmedia.art-map.co.kr%2Fart-map%2Fpublic%2Fupload%2F2026%2F10%2Fexhibition%2F4b822b933ebf1beef7aaf5d7306d4d42.png&w=3840&q=75)
[소마미술관] 기념에서 풍경으로
소마미술관
전시 기간 2026.10.17 — 2027.02.14 · 서울특별시 송파구
전시장 갤러리 더 플럭스, 더 플로우
전시 기간 2021.11.09 – 2021.11.14
기획전
종료된 전시입니다. 아래 관람 정보는 전시 당시 기준입니다.
공식 홈페이지 바로가기 (새 창)상처의 흔적 가운데 드러나 있는 인간 존재의 한계적 상황에 대하여
서동수 작가는 삶을 살아오면서, 그리고 작업을 해오는 가운데 이번 전시의 주제로 제시한 것처럼 “Where must we go?”와 같은 인간의 삶에 대한 매우 본질적인 질문들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일견 현재의 일상적 삶이나 작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철학적인 질문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에게는 어딘가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고 지금도 어디론가 가야 할 것 같지만 그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일상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현실을 매일 마주하며 살아가는 삶 자체에 대해서 이처럼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자신의 삶과 작업을 시작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하는 가운데 삶을 살아왔고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서동수 작가가 주목하게 되었던 것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였다. 작가는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인간이란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로, 인간 사회라는 것은 욕망과 욕망이 부딪힌 결과물로 파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작가는 “욕망은 인간의 삶을 살아가게 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의 삶을 괴롭힌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언급을 하게 된 것은 욕망이 인간 사회 내에 계급이나 계층을 만들어내기도 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욕망이라는 것은 예리한 모서리가 되어 서로를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동수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인간에 대한 질문이며 인간을 찾아나서는 작업이라고 밝힌다. 그런데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상처’를 추적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가에게는 인간에게 남겨진 ‘상처’를 추적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작은 역사’를 추적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동수 작가의 작업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상처나 인간의 몸에 생긴 외상을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사진 작업을 통해 담아내고 있는 것들은 인간 몸의 상처를 연상케 하는 사물에 새겨진 ‘스크레치’일 뿐이다. 작가는 인간들이 많이 사용하는 철문이나 화물 배송차량의 문짝에 남겨진 수 많은 인간 행위의 결과물들을 발견하고서 그것들을 ‘상처’라고 지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모든 인간 행위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비롯한 것이기에 인간이 만든 수없이 많은 ‘스크레치’들 역시 인간 욕망의 흔적이 기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작가에게는 이것이 인간의 ‘작은 역사’이자 인간의 ‘상처’라고 읽어낼 수 있는 근거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동수 작가가 발견해낸 것들, 즉 물질에 남겨진 ‘상처’의 흔적들은 인간의 몸에서 볼 수 있는 상처와 유사한 이미지들을 일상의 사물들에서 찾아낸 것일 수도 있고 관계의 대상인 타자로부터 상처의 흔적을 찾아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인간 사회를 욕망과 욕망이 부딪힌 결과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작가는 사물에 남겨진 상처들에 감정 이입함으로써 그 상처의 흔적들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현대의 인간 사회 속에서는 더욱 강력해진 욕망과 욕망의 충돌을 접하게 되고 인간 욕망의 실체를 더 절실하게 경험하게 되면서 작가는 그 충돌의 결과물들을 점점 더 생생하게 느끼게 되었는지 모른다. 작가가 그의 작업 속에 담아낸 것들은 이를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사물에 남겨진 흔적들을 ‘상처’라고 부르게 되었던 세밀한 느낌마저 작업을 보는 이들의 피부 속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사물에 남겨진 ‘상처’의 흔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흔적을 만들어낸 가학적 정서와 피학적 정서가 동시에 분출되고 있는 것 같은 미묘한 지점들이 혼성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감지된다. 욕망과 욕망의 충돌 지점에는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흔적과 피해자에게 가해진 결과적 흔적이 동시에 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대비처럼 생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 한 지점에 동시에 새겨져 있는 듯,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흔적들이 중첩되어 드러나 있는 장면에는 강렬한 욕망과 쾌락에 대한 감각과 함께 고통과 상처에 대한 감각이 계속 교차되어 있다. 이러한 부분이 감지 되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관점의 차이 때문이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인간에 내재된 양면성 때문이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동수 작가가 작업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은 어쩌면 인간의 상처와 닮아있는 이미지나 인간 내면에 새겨져 있는 욕망의 충돌이 남겨놓은 예리한 흔적들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야누스적인 인간 실체와 그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에 대한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서동수 작가에게 있어 욕망과 고통이라는 것은 메비우스띠처럼 서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로 읽혀진다. 욕망이 없으면 고통도 없을 수 있겠으나 인간은 한계 지점을 마주하게 된 인간 존재는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 인간이 한없이 욕망하는 존재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아리러니한 상황에 대해 각성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의 작업에서 이러한 한계 상황 속 놓여진 인간의 욕망과 고통에 대하여, 그리고 생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 출렁이는 인간 삶의 혼란스러움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견고하고 예리한 사물이 또 다른 사물과 만날 때 구조가 강한 것이 약한 것에 부딪히게 되면 흠집이 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상처투성이가 된 구조가 약한 사물만 남게 된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상하게도 바로 그곳에 시선이 머물게 되었고 그것에 동일시하여 아픔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게 되는 자기 자신을 찾아내게 되면서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통이 쾌락에 접붙임 되어 있었던 것이고, 상처가 욕망과 접붙임 되어 있었으며, 생의 충동 안에 죽음의 충동에 겹쳐져 있었다는 사실과 그 ‘한계적인 상황’이라는 것의 다른 이름이 ‘모순적 상황’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자 작가는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적 구조로부터 근본적 탈출구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물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제시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이 질문은 진정으로 가야 할 곳을 묻는 의문을 표출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작가는 인간의 한계적 지점에서 막다른 골목에 서있을 수 밖에 없는 모순적 상황임을 발견하고 이미 자신의 존재적 위치를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작가는 해답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질문을 던지면서 인간의 처해 있는 실존적 상황만을 응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처의 흔적 가운데 드러나 있는 욕망과 고통에 대한 감각을 끊임없이 느끼면서 말이다.
이승훈 (미술비평)
세와 새
누구는 줄곧 세상의 단편을 보았다. 세상은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 흔적을 냈는데, 그래서 태초에 상처가 있었다. 그건 아주 오랫동안 떼어지지않는 팔다리 같이 우리를 묶는 염증이라 어쩌면 우리는 그걸 우리의 팔다리처럼 사랑해야할지도 몰라.
세상과 새장은 어떤지 닮은 것 같다. 입안에 굴려보았을 때도, 새를 가만히 품고 있을 때도, 새는 알 밖으로 나가기 위해 세상을 깨야한다. 시작은 알의 상처다. 곧 조각조각으로 갈라지고 바다보다 두꺼울 줄 알았던 상념들은 깨지는 거야.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우리는 그걸 오래 기다리는 것 같기도, 기다려야만 하는 것도 같아. 그건 곧 새의 극복이 되고 새로운 새장으로의 첫걸음이 된다. 새장은 어쩐지 깨고 나온 세상보다는 넓지만, 잠들기 어려울만큼 복잡하고 우리를 끊임없이 가냘프게 만들어.
나도 한 때는 새가 되고 싶었어.
나도.
그러나 우리는 갇혀있는 새, 종종거리는 새, 아니야 어쩌면, 우리는 그냥 보호 받는 것 일수도 있잖아. 우리가 우리인 걸 잊어버릴 때까지 말이야. 나는 법을 잊도록 꾸준히 종종거리는 새. 우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사실 그 알을 깨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우리 어쩌면 날 수 있는 미래를 손에 쥔채 죽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네. 우린 희망을 깨고 나온거야. 그것 참 되게 상처다 그치. 응 꼭 뼈만 남은 기분이야 .
그래서 태초에 상처가 있었다.
나는 하여튼 날 수 없어서 닿을 수 없는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곧 벽 같았다. 하지만 웃기게도 벽 아래 우리는 아무 것에도 지탱되지 않았다. 이유는 없었지. 대신 존재를 증명하는 중력이 우리를 끝없이 삶으로 묶고, 우리는 그게 상처인걸 까먹을 때까지 자꾸 걸어가고, 그러다 우리는 사실 끝없이 고통받고 있다는 걸 잊을 때까지 멀리 가면 어쩌지? 그 하늘같은 벽은 우리를 단단하게 감싸는 또 하나의 알이 되어서 우리는 자꾸 상처가 나서 닳아가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몸을 식혀가며 꾸준히 생각하겠지.
그래도 갇혀있는 곳에 희망은 없어. 그는 대신 달렸다. 주변에 있는 상처들의 출처를 쫓았다. 마치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하염없이 궁금해하는 것처럼. 웃기지, 우리는 그 안에 있어. 우리가 나는 새가 되어, 그 안에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되었다가, 수많은 갈래의 마른 잎이 되어 흔들리다 상처로 다시 만날거야. 우린 어디에서도 그게 우리라는 걸 알아보겠지. 피투성이의 우리. 그 안에 우릴 닮지 않은 것은 없으니까. 더 이상의 상처는 우리에게 고통이 아니야.
이제는 가자. 이제는 가자.
우리는 새장을 나간다. 우리의 기념비적인 걸음에 새 장을 마련하는 거야. 우리가 찍은 발자국은 행성의 영원한 상처로 우리를 기록하겠지. 기어이 황홀하다.
상처입은 나의 태초에게 올림
딸이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그렇듯 인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한다. 죽지 않을 만큼의 안전함을 욕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쾌락으로, 탐욕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로 그 욕망이 에너지가 되고 이를 토대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욕망하는 바가 인간을 규정하게 되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욕망은 인간의 삶을 살아가게 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의 삶을 괴롭힌다. 인간이 욕망하는 것들이 만들어낸 구분의 틀은 예리한 모서리가 되어 서로의 욕망을, 혹은 서로의 삶을 긁히게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상처투성이로 만들기도 한다.
인간의 삶이란 욕망과 욕망, 삶과 삶이 부딪히는 상황 속에서 상처를 주고 받는 사투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나의 작가적 탐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욕망하는 인간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남겨진 이 상처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상처는 인간이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자 꼬리표이다. 그것은 인간이 역사라고 부르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작업에서 인간이라는 것, 바로 이것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것은 작은 상처 혹은 작은 역사를 추적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찮아 보이는 모서리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낡은 트럭의 철판에 남겨진 스크레치들을 추적하기도 하였다. 끊임없이 살아 움직였던 모든 것들에서 그곳에 남겨진 상처의 흔적을 찾아나서게 되자 그곳에서 비로소 인간의 비명 소리를,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아니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이 비극적인 순간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쾌락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이 느낌들은 과연 상처가 가져온 것인지, 상처를 견뎌낸 삶이 가져온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단지 그 상처의 흔적들을 카메라 안에 담아내고 있을 뿐인지 모른다. 내가 응시하게 된 것들이 내 안의 상처가 불러낸 것인지, 내 안의 욕망이 불러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흔적들을 담아냄으로써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상처 혹은 욕망에 대해 되새김질 하고자 할 뿐이다. 그것이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고 삶이다.
2021. 서동수
서동수 (徐東壽) Dongsoo Seo
1967. 09.12.~
199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2020 제1회 개인전 (인사아트센터 본관)
2021. 09 NFT 비긴즈 아트페어 (사이아트센터) 2021. 09 빌라다르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21. 05 창작미술협회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서울의 바람전 (인데코 갤러리) 1995 감성과 표현전 (이콘 갤러리) 1995 서울의 바람전 (인데코 갤러리) 1995 뉴폼전 (윤 갤러리)
2021. 07 소마미술관 아카이브 등록작가 (소마미술관)
(출처= 갤러리 더플럭스,더플로우)
Where must we go, 2020-16 (Edition 1/10) · Archival Pigment Print on canvas · 116.8x80.3cm · 2020 (출처= 갤러리 더플럭스,더플로우) · Where must we go, 2020-16 (Edition 1/10) · Archival Pigment Print on canvas
Where must we go, 2021_10-2 (Edition 1/10) · Archival Pigment Print on canvas · 116.8x80.3cm · 2021 (출처= 갤러리 더플럭스,더플로우) · Where must we go, 2021_10-2 (Edition 1/10) · Archival Pigment Print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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