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서울
Seosomun Shrine History Museum/Seoul
Location
서울 중구 칠패로 5
Hours & Holiday
09:30 - 17:30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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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147-2401

About Space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이야기
1. 성저십리의 번화한 공간
:조선시대 교통의 중심지, 상업적 농업·수산업과 수공업의 발달
조선시대에 소의문(昭義門)이라고도 불리었던 서소문은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었던 간문(間門)이었다. 아현에서 서소문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마포·용산 나루터에 도착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의 물류가 집결되어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였으며, 도성 내외를 잇는 육로가 교차되어 성저십리 내 번화한 지역 중 하나였다.
이러한 위치적 특성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칠패시장과 서소문 밖 시장이 서로 이어지며 번성해 종루가상(鐘樓街上), 이현(梨峴)과 함께 한양의 대표적 시장으로서 상업적 농업 · 수공업이 성행하였다. 당시 서소문 밖과 칠패시장에서는 시전상인 외에도 평시서에 등록되지 않은 난전상인들에 의한 활발한 상행위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어물과 채소의 거래량이 많았다. 아울러 중국으로 향하는 조선시대의 1번 국도인 의주로(義州路)와 접해 있어 한양도성 밖의 대표적인 외교와 상업활동의 중심공간으로 발전했다.
*성저십리 조선시대 한성부에 속한 지역으로, 도성으로부터 4km(10리) 이내의 지역
2. 국가의 공식 처형지
서소문 밖 네거리는 당고개, 새남터, 그리고 절두산과 더불어 조선시대 공식 참형장이었다. 이는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또한, 서소문 밖 네거리가 정부 사법기관인 형조·의금부와 가깝고,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칠패시장’과 인접하여 일벌백계(一罰百戒)가 가능한 공간적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서소문 밖에서의 행형기록은 연산군 10년(1504)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는데, 죄인을 이곳에서 능지처참한 후 머리를 베고 시신을 전시하여 뭇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내용이다. 이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정조 사후(1800)부터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에 대한 처형이 주로 이루어졌다.
*[예기] 중국 고대 유가(儒家)의 경전으로, 오경(五經) 중 하나
3. 한국 최대의 가톨릭 순교성지 |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일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부터 1873년까지의 병인박해기를 거치며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을 당했다.
1925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시복식으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추가로 시복되었다. 이후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재한 시성식에서 이들 103위 복자들은 성인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인물 44명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14년 8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 시복식에 앞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먼저 찾아 참배하고, 이후 시복식에서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를 복자로 선포하였다. 이 중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복자는 27명이다. 따라서 교회사적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단일 장소에서 최다 성인과 복자를 배출한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이다.
2018년 9월,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포함한 서울 속 천주교 순례길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박해와 순교, 자발적 신앙 수용의 특별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아시아 최초의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출처=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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