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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608갤러리

정충일: Circulation

종료

전시 기간 2023.11.09 – 2023.12.10

기획전
정충일: Circulation 포스터

종료된 전시입니다. 아래 관람 정보는 전시 당시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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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시간
11:00-18:00
휴관일
월요일
관람료
정보 확인 필요
주소
경기 양평군 서종면 중미산로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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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소개

숨의 두께

봄, 가을이 없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계절이 모두 있는 나라에서 살다 보니 환절기 감기 조심하라는 말을 안부로 많이 쓴다. “이 계절을 만끽하세요!” 라는 피부 친화적 응원보다는 호흡기에 대한 걱정이 아무래도 더 세심하게 예를 갖춘 것 같아서일까, 큰 명절을 제외하고는 서로의 목구멍을 챙기느라 바쁜 것도 생각해보면 우리 현대인의 역설적인 초상 중 하나다. 하긴 ‘목숨’이 ‘목에 숨이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순우리말임을 새삼 강조하는 강사들도 많고, 사전적 정의 “사람이나 동물이 숨을 쉬며 살아 있는 힘”을 읽어보면 대단한 실존주의 철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른바 ‘생의 의지’를 다지게 된다. 또한 호흡의 어원은 쉴 식(息)자가 이음동의어로서 둘을 “息息”로 붙여 쓴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어떤 어휘가 주는 지적 유희나 정보 습득으로서의 흥미를 느끼다가도 갑자기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활자 기반의 언어는 파고 들어갈수록 직관성을 잃어버림으로써 그만의 생명력을 오히려 놓치게 되는 실수를 범하곤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양평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작가가 처음 권했던 것은 여유로운 차 한잔이었다. 딱히 그 상황을 멋들어지게 촬영하거나 작업에 대해 들이밀 듯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 심지어 “사실 말과 글로 표현하는 데 대한 필요성을 거의 느껴오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그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어떤 부분. 그에 대해 존중하기로 하면서, 평론에 대한 자유를 더 보장하고 싶다.”고 이어나갔다. 딱 보고 혹평을 해도 좋다고 했다. 글 쓰는 이에게 언로를 열어주는 이러한 말들은 그야말로 ‘숨통을 트여주는’ 그런 것이다. 이때 필자는 사실 곁눈질로 한쪽 벽에 걸려 있거나 기대어 있는 작업들을 슬쩍 슬쩍 보고 있었다. 이미 선행 평론들에서도 다뤄진 바 있는 순환 주제의 작업을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 왜 이 작가가 회화가 주는 힘을 믿고 있는지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들숨과 날숨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리라는 생각을 그때에서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호흡이 좀 더 커지고 있음을 느꼈는데, 이러한 것을 ‘감동’이라는 짧은 치장으로 표현하는 것부터가 언어의 한계요 획일화된 사용이라는 문제의식마저 든다.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조금 더 감각적으로 표현해보자면, 차갑게 실감하라며 뜨겁게 반응하게 하는 것이 정충일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순환, 영원한 연결과 같은 커다란 주제를 설명하는 것이 응당 독자가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알지만 필자는 이미 취해버린 그 안의 구체로서의 작은 추상 개념으로써 ‘숨’이 어떤 모습으로 발현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꾸만 파고들게 된다. 어쩌면 작가가 권한 차 한잔의 여유조차 작업을 둘러보기 전에 숨 고르기를 한 것이었을 테니, 꼭 이렇게 읽어내려가야 하는 것이 아님에도 이러한 활자들 역시 적어도 전시 문법에 있어서는 들숨에 해당할 지도 모른다. 이분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작가가 날숨처럼 내뿜은 작업들은 그 또한 어떤 들숨들 끝에 체화한 것이리라 짐작해보는 맛도 있기에 정충일의 작업은 그 자체로 이미 커다란 숨의 두께 안에서 순환하고 있으며 감상자들에게 자유로움과 동시에 생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를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충일의 작업은, 점·선·면에 대한 기존의 문법을 깨뜨리는 동시에 그 세 요소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역학 관계를 충분히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즉, 선이 그 자체로 면이기도 하고 면을 지탱하는 외곽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의도를 깔지 않고 그려진 겹의 미학이기도 한데, 자세히 볼수록 이러한 발상을 본 적이 없고 그 시도 자체가 이미 오래전부터였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부터 자신의 독자성을 확보하는 단계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색에 대한 본능적인 ‘에너지’로서의 사용. 점이 일자가 되어가며 형상화하는 그 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차용하고, 어떤 작업에서는 입체인 듯 아닌 듯, 선 지향인 듯 면 지향이고 세로 지향인 듯 가로 지향인 전략적 무전략을 종횡하는 듯 보였다. 때로는 무광인 듯 유광인 듯 특수 물감을 사용하고, 때로는 팝아트와 같이 복제 가능한 작업을 보여주려는 건가 싶었는데 3×3, 4×4와 같은 제곱 정방형 구성 안에 자유롭거나 즉흥적으로 맞춤을 할 수 있는 구조를 짰다는 점에 ‘아차’ 싶었다. 정충일이 파내려간 홈은 조형 이전에 그의 호흡이었고, 정충일이 그어낸 선은 화가의 작업 이전에 그가 다루는 점의 에너지 운동이었다. 그렇게 작가는 스스로 그것을 즐기며 동시에 예술이 디자인을 능가하는 근원적 ‘아이러니’ 미학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디자인을 명확하게 구분하거나 아래로 보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근원으로서의 예술이 갖는 아이러니의 측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이 일말의 오해를 방지할 뿐만 아니라 정충일의 미학에 대한 견해를 좀 더 내보일 수 있는 기회라는 판단으로 이어나가 본다. 최근에야 캘리그래피나 일러스트레이트 등이 표면적으로 디자인의 영역에서 많이 활약하고 있지만, 본래 디자인은 예술이 현대에 들어서며 어떤 실용성을 구축하는 방도로서 고안된 시각 언어의 결합 상태이기에 거기에 예술적 요소나 결과적 측면의 예술성이 포함될 수는 있으나 그 자체로 예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즉, 예술은 어떤 실용적 필요성이 처음에는 없었거나,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인간의 근원을 발현하고 있는 상태 또는 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은 각 작업이 그것을 주제로 삼고 있지 않더라도 대개 아이러니의 미학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이러니의 세계가 문학을 바탕으로 여러 상황적 다양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운명의 아이러니’나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처럼 어떤 이분법적 체계 안에서의 봉착, 즉 죽음을 염두에 둔 이야기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살아 있는 순간에 대해 분명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따금씩 죽음, 혹은 사회적 죽음을 상기하게 하는 사건을 만나게 하는 기제이다. 죽기를 각오했기에 더 살았고, 이타적이었기에 더 성공할 수 있었고, 무지함을 만나게 해주었기에 인정을 받았지만 다시 소수에 미움을 받아 스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타살적 자살 등 오랜 서사가 끌어안고 있는 아이러니의 미학은 단순한 서술적 테크닉이 아닌 인간 본연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예술적 장치이기에 디자인되었다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공기와 같은 세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충일이 자신의 호흡 안에서 점·선·면을 이해하고 대하며, 결국은 밖으로 발현시키는 이 세계는 이따금씩 특정 공간들 안에서 감상자들과도 예술적인 만남을 통해 또한 특별한 숨을 쉬게 되고,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게 되기도 하며, 언어 이상의 대화를 요청하고 성사시키기도 한다. 육체적인 숨만 하더라도 어떤 거리, 상황, 인원이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펼쳐질 수 있는데 하물며 정신적으로 침투하는 예술 작품이 쉬는 숨은 더욱 그렇고, 그것을 각성시킨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충일의 작업에 스며들어있는 ‘숨’의 시간과 두께는 그야말로 작품과의 ‘배어 나오는’ 대화를 만끽할 수 있는 통로, 그러니까 ‘숨통’을 제공하는 것이다. 작업실이 자리한 양평의 제법 깊은 골짜기에는 계곡물이 은밀하면서도 힘차게 흐르며 서울살이에 지친 필자의 속을 뻥 뚫어주었는데, 작가와의 만남을 마무리하며 잠시 그 앞 응달에 서서 말없이 물이 내려오는 산등성이 사이의 좁은 숨통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이곳에 이웃집들이 없었을 때부터 그야말로 자연에 첫발을 내디딘 문화의 시초처럼 살아온 작가의 세계가 자연 앞의 인간을 얼마나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었을까 유추해보게 된다. 자연의 경쾌함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근원의 무게가 계속 흘려보내는 에너지의 부피와 무게를 느끼는 자가 비로소 다가갈 수 있는 속성이다. 정충일의 작업은 그 섭리를 담고 있었음을, 계곡물은 말 없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이렇듯 인간은 자연에 대해 경탄하고 예술가는 그 속성을 끌어오기 위해 애쓰기도 하지만, 감히 그것을 분석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예술적 재현은 마치 숨처럼 그것이 붙어 있음을 잘 느끼지 못하는 중에 이따금씩 더욱 절실해지고 두터워지는 시간과의 대화 그 자체 아닐까. 그러므로 그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 물성이 어떻니, 구도가 어떻니 하는 말조차 사치스럽게 필요할까? 이러한 말조차 너무나 모두 사족인 것을, 정충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직관 대 직관의 정면 대화를 요청해온 것 같다.

글/ 배민영(예술평론가) (출처 = 608갤러리)

전시장 정보

608갤러리

공간 운영
11:00 – 18:00
정기 휴관
월요일
전시장 문의
010-8482-5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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